한국예탁결제원 웹진
Vol.264 AUTUMN 2022

인생의 코스요리는

순서가 제각각이다

돌아보면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을 나는 긴 고민을 하고 내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치 끼니 때가 되면 저절로 먹고 싶은 게 떠오르듯 그대로 마음을 따라 결정했던 게 전부였다. 대학이 그랬고 방송국에 입사했던 것도, 잘 나가던 PD 생활을 잠시 접고 유학을 떠났던 것도 면밀한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마음을 따라 선택했던 내 인생의 정답들이었다. 그때의 정답이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정답일까? 이 물음 앞에 가끔은 답을 망설일 때가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대가는 때로는 가혹하고, 때로는 그 길을 개척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욱정사진요리인류키친, 문학동네

아직도 전채요리 중인
내 인생

인생이 코스요리를 먹듯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행된다면 어떨까? 사회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그 나이에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무리 없이 사는 건 대단히 안정적일 것이다. 나 역시 한동안은 그랬다.
방송국에 입사해서 예능과 시사프로그램을 만들며 자리를 잡는가 했더니 입사 7년차에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방송학을 공부하면서 그 동안 모은 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석사 취득 후 연출한 <누들로드>가 호평을 받으며 PD로서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결과적으로 그때의 선택은 정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인생도 코스요리의 마지막인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도 되는 순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메인요리는 시작도 못한 채 레시피를 바꿀 생각만하고 있었다.
<누들로드>가 성공했지만 정작 나는 요리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다. 명색이 음식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요리를 못한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불편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갈망이 되었고 급기야 그것만이 인생의 정답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내 500일 간의 르 코르동 블루 유학은 대책 없이 시작되었다.

500일 간의 레시피,
셰프의 탄생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 외에는 별다른 재주라곤 없는 사람이다. 여기저기 어지럽혀 놓을 줄 만 알았지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렇게 허술한 내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주방 안에서 무얼 할 수 있을지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그리고 유학자금과 같이 현실적인 걱정거리가 자리잡았지만 대책 없이 낙천적인 성격 앞에 걱정도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모아놓은 돈을 탈탈 털어 떠난 요리유학은 낯선 세상맛을 제대로 맛보게 한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여러 번 상이 엎어진 후에야 가까스로 메인요리가 차려졌다.
처음부터 나는 셰프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에게 요리는 인간과 세상과 역사를 보는 창이다. 르 코르동 블루에서 배움의 시간은 까다로운 프랑스 요리의 복잡한 레시피나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의 요리를 앞에 놓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음식을 만드는 일의 경이로움과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이었다. 그것은 타인의 요리, 다른 문화의 음식에 대한 인정이었고, 건강한 식재료를 준 자연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프로듀서로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이 같은 방향성을 잡아준 것만으로 500일 간 주방 안에서의 고군분투는 의미가 깊다.

취향에 따른
선택과 결과의 향유

일을 하면서 종종 목격하게 되는 현실이 한국 사회는 정답을 정해놓고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의사, 나의 취향과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타인이, 사회가 정해놓은 답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번의 유학을 온전히 사비로 다녀온 나는 유학 중 혹은 유학을 다녀와서 금전적으로 힘들었던 때가 더러 있었다. 그래도 두 번의 유학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회가 정해놓은 답을 선택해 성공가도를 달려도 그걸 누리지 못하고 직업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꽤 봐왔다. 결국 자기의 취향과 의지, 의사가 분명하지 않은 선택의 결과는 삶을 향유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결정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하고 싶은 일들은 리스크가 크다. 그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자기의 취향에 기반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해볼 것을 권한다. 그것이 농사이든, 춤이든 원초적인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취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나에게는 요리였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그 길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꿨다.
공평하지 않은 인생의 코스요리, 나에겐 무엇이 마지막에 나올까? 영영 달콤한 디저트는 맛도 못 본 채 끝나는 건 아닐지 끝까지 살아야 봐야 안다. 그래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이제까지 한 내 선택들에 대한 믿음과 지금 향유하는 삶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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