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58 SPRING 2021

#Taste Docu

햇빛과 바람이 보내준바다의 선물, 소금

 

박범신 작가의 <소금>이라는 소설에는 소금이 ‘온다’라는 표현이 있다.
농부가 논밭에서 봄, 여름, 가을 동안 햇빛과 바람, 비에 의지해 땀으로 알곡을 생산하듯이,
염부는 해안가 소금밭에서 햇빛과 바람에 의지해 땀으로 소금꽃을 피워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부시고 가뿐한 결정체(結晶體)의 이 귀빈을 우리가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상우(칼럼니스트)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변혁의 원동력이 되다

어렸을 적 한 번은 봤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알프스산맥에 자리한 아름다운 도시 잘츠부르크가 배경이다. 모차르트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이 도시는 다름 아닌 ‘소금의 성’이다. 주변에 암염 산지가 많아 소금으로 부를 쌓아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류의 역사 전체를 꾈 수 있게 된다. 소금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인 까닭에 부를 쌓을 수 있는 밑천이 됨과 동시에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금을 발견하기 이전 인류는 육식을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소금을 섭취할 수 있었다. 그러다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소금을 만들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음식의 변질을 막고 보존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졌고, 인류의 이동으로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 13~14세기 절인 청어와 대구가 만들어지면서 네덜란드가 대항해 시대를 연 것이 대표적이다.
소금은 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서 생산했지만, 소금광산을 통해서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양과 대륙의 구분 없이 모든 문화권에서 접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거대한 소금광산을 지배해서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인류사를 흔든
음식 이상의 음식

이처럼 소금은 음식 이상의 음식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무기로도 사용된 바 있는데, 적진을 점령한 군대가 적들이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도록 경작지에 소금을 뿌린 것이 그 시초이다. 한때 수 많은 문화권에서 신성시되기도 했는데, 어느 시대에서는 세례 받는 아이의 입술에 소금을 얹어 더러움을 씻는 상징적인 존재로 그 값어치가 어마어마했다.
절대왕정이 통치하던 시절 유럽에서는 전쟁을 하려면 소금부터 준비했다.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대구와 청어를 상하지 않게 보관하려면 소금에 절이는 게 필수였으며, 병사들이 다쳤을 때도 소금물로 치료했고, 그들의 월급 또한 소금으로 지불했다. 오늘날 급여를 의미하는 샐러리(Salary)는 이 시대의 ‘소금 지불’이라는 뜻의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온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사치스러운 왕실의 생활을 위해 소금세를 지나치게 많이 걷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소금은 누구나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소금세를 높이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그만큼 흔들리게 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염세(Gabelle)처럼 소금에 세금을 부여하는 문제는 거대한 사회의 변화나 혁명을 불러일으킨 원인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간디의 소금 행진’이다. 영국 정부가 인도의 소금세를 2배로 올리자 1930년 4월 5일 간디는 78명의 추종자와 함께 이에 대항하기 위해 행진을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썰물이 빠져나가는 시간에 맞춰 바다로 달려간 그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소금을 집어 들며 공개적으로 영국 총독의 절대 권력에 저항함을 선언했다. 소금 행진이 영국의 식민통치를 종식시킨 건 아니었지만, 전 세계 여론의 눈이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쏠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소금길 위에 핀
새로운 문명의 꽃

한국은 삼면이 바다라 소금은 대부분 해안지방에서 만들어졌다. 바닷가에서 해염(海鹽 : 바닷물로 만든 소금)을 생산하여 내륙에서 소비했는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운송비 때문에 소금가격은 더 비쌌고, 반면에 곡물 생산이 많았던 내륙에서는 곡물가격이 해안지방보다 저렴했다. 따라서 해안의 어염(魚鹽)을 내륙에 팔고, 또 내륙의 곡물을 해안에 팔면, 싼 것을 가져다가 비싸게 팔 수 있어 상당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돈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소금길이 형성되었다.
한양의 상인들은 남한강 수계를 거슬러 올라와 단양, 영춘, 영월뿐만 아니라 횡성, 평창 등 영서 산간지역까지 서해안의 소금을 공급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곡(李穀, 1298~1351)이 자연도(紫燕島)를 지나가며 시를 읊었는데 여기서 자연도는 지금의 영종도다. 이곳에서 자염을 구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천 짠물’이란 말이 전해지는 것도 인천지역에서 소금을 구운 일과 관련이 있다. 젓갈로 유명해진 소래포구에는 염창(鹽創)이 남아 있고, 주안에는 일제 때 염전이 있었다.
옛날 서해안은 염전이 지천이었다. 이 염전과 연결된 크고 작은 ‘소금길’의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서울 마포구의 염리동은 소금장수가 많이 살아서 불리던 이름이고, 염전교는 소금 상점이 있던 곳의 흔적이다. 고창의 질마재길은 1400여 년 전 검단리 사람들이 검당포에서 화덕에 불을 지펴 구운 소금을 등짐에 지고 선운사로 가던 길이다. 제염법(製鹽法)을 가르쳐준 검단선사에게 보답하고 부처님께 봉양하려고 걸었던 보은(報恩)의 길이었다고 한다.
물자를 나르는 통로였던 소금길은 한편으로는 세금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을 열어주는 대신 영주들은 상인들에게 세금을 받아 또 다른 방편으로 부를 쌓아갔고, 이런저런 이유로 세금을 올리기 일쑤였으니 상인들에게는 아니 갈 수도 없는 고된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눈물 위로 문명과 문명이 교차하여 새로운 문명이 발아했으니 그들의 눈물도 소금만큼이나 값진 것이었다면 위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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